유적 귀암(歸巖) 이공(李公) 신도비명과 그 비문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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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8-05-20 06:48 조회 6,661회 댓글 0건본문
귀암 이원정의 신도비로 채제공(蔡濟公 1720~1799)이 짓고 7대 후손 이조수(李肇秀 1811~1884)가 글씨를 썼다. 현재 석전리 동쪽 산록에 있는 동산재(東山齋 - 이도장등 3대 齋舍) 옆에 위치해 있다. 본래 이 비석은 마을 입구에 있었다고 하는데, 1950년대말 마을 앞쪽에 미군부대가 들어서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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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증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행숭정대부 행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 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 귀암
이공 신도비명 병서
제공(濟公)이 돌아가신 총재 귀암(歸巖) 이공(李公)의 행장을 읽고 여러번 울었고 길이 탄식하면서 더욱 편당의 화가 사람의 집과 나라에 미치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도다. 무릇 숙종대왕은 밝으신 임금이요 공은 충성된 신하라. 충성된 신하로서 밝으신 임금을 섬기면 마땅히 그 이로운 혜택이 백성에게 베풀어지고, 그 예우가 종신토록 있어야 하는데 어찌된 것이 척신들이 남몰래 권도를 잡고 화망을 터틀어 곤강(崑綱)의 열염(烈焰)으로 우리의 양옥(良玉)을 녹여버리려 하였는가? 이것이 하늘이냐 귀신이냐. 슬프도다! 당화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끝내 속이지 못하는 것이요. 이치는 끝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일기(一紀 12년)가 못되서 임금님의 깊은 마음에 크게 깨달은 바 있어 가엽게 생각하는 교지가 여러 번 내리고, 그 단서(丹書)를 시켜서 영의정으로 증직을 내리니 이에 하늘이 또 한 사람을 이겼도다. 군자에게는 권할 줄을 알고 소인에게는 두려움을 알게 하니 비록 당인(黨人)인들 하늘이 하는 일에는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공의 휘는 원정(元禎)이오 자는 사징(士徵)이오 귀암(歸巖)은 그 호이다. 그 선대는 광릉인(廣陵人)이니 고려말기에 있어 판전교시사이시고 호는 둔촌(遁村)이시며 문학과 기개와 절조로 유명하신 분이었으니 그 분이 집(集)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형조참의가 되시고 증직으로 영의정을 받으신 분이 있으니 그 분이 지직(之直)이시고 3세(三世)를 지나 영남의 성산(星山)에서 장가들고 그 곳에서 사신 분이 계시니 이 분이 지(摯)신데 자손들이 드디어 영남인이 되었다.
또 그 후 3세에 희복(熙復)께서는 증좌승지요. 윤우(潤雨)께서는 호 석담(石潭)이오 빛나는 벼슬을 역임하시고 참의로서 이조참판의 증직을 받으시니 이분이 공의 증대부(曾大父)와 대부(大父)이시다. 석담께서는 정한강(鄭寒岡)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돌아가신 뒤에 한강서원에 배향되었다.
아드님은 도장(道長)이신데 호는 낙촌(洛村)이시다. 한원(翰苑)을 거쳐 천조랑(天曺郞)이 되시었으며 벼슬은 홍문관응교였고, 좌찬성의 증직을 받았으며 당숙부되시는 군자주부(軍資主簿)로 이조판서의 증직을 받으신 영우(榮雨)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배(配)에는 정경부인 안동김씨신데 판중추부사 하담김공(荷潭金公) 시양(時讓)의 따님이니 공의 고비(考妣)이시다.
공은 총명하고 영특하기가 보통사람에 지나침으로 어렸을 때부터 하루에 수만 글귀를 외우더니 자라서는 글을 읽는데 8행(八行)을 한꺼번에 내려 읽으니 그 휼륭한 소문이 크게 떠들썩했다.
인조때 무자년에 국자생원에 합격했고, 효종때 신묘년에 한성시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임진년에 증광문과 거전시에 제2로 뽑히니 예에따라 상의직장(尙衣直長)이 되었고, 병신년에 강원(講院)설서에 제수되었고, 천거해서 사국(史局)에 들어가 한림(翰林)이 되었으니 석담부터 낙촌과 공까지 이와 같이 조·자·손 3대가 이어서 한원(翰苑)에 기록된 것이 이 세상에서 드문 일이다.
이듬해에 봉교로부터 전적으로 올라가고 병조좌랑으로 정랑으로 간원정언으로 사헌부지평으로 강원문학으로 전임되었고, 전주판관으로 제수되었다가 1년만에 장성부사로 승진하니 임명권을 가진 자가 허위로 잘 다스린다고하여 마땅히 내직으로 승진하여야 된다 하였으나 그 실상은 이조의 명선(名選)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기해년에 사은서장의 명을 받들고 청국에 부임했었다. 현종이 새로 즉위하시니 공이 주연 강관으로 있을 때부터 가장 깊이 잘 알아주심을 받았는지라 이번 사신으로 감은 임금이 친히 가린 것이다. 이듬해 여름에 돌아오심에 다시 장령으로 제수되었다. 여가를 얻어 귀성하고 겨울에 강릉부사로 배했더니 관아에 귀신이 나온다하여 수리도 하지 않고 내버려둔 지 몇 해 된다 하는지라 공이 부임하여 곧바로 소제하고 들어가고자 한즉 아전들이 못하게 서로 말리었으니 태연히 못들은 척하고 본즉 고목이 뜰에 서 있는데 그 가지의 모양이 심히 괴상한지라 급히 명하여 그물로 둘러싸고 나무 뿌리에다 숯을 피우니 두 마리의 푸른 여우가 뛰어나와 죽으니 그 후 관부가 드디어 편안해졌다.
신축에 조정의 천거로 동래부사로 삼으니 공이 전에 장성에 있을 때 굶주린 백성을 위해 지성을 다함으로 백성이 살 길을 힘입었는데 이때의 동래의 백성들이 또한 여러 해 계속해서 굶주리고 있어서 형편에 따라 널리 구제하기를 장성 때와 같이 잘하고, 그 지역에 경계를 구별함이 없이 하니 그 근처의 백성들도 많은 혜택을 받게 되었다.
어사 남공 구만이 그 일을 상께 알려 올리니 상이 크게 아름답게 여겨 말을 하사하여 총애하셨다. 겨울에 왜인이 관사를 옮기는 일로 말썽이 있어 공이 벼슬을 내놓게 되었으나 사실은 공께서 간섭한 일이 없는 것이다.
계묘년에 의주부윤에 배했으나 부임하지 않고 갑진에 판결사에 배했고 승지로 옮겼는데 얼마 안 있다가 전주부윤우로 보하였다가 관찰사하고 체례를 다툼에 맞서서 굽히지 않으니 관찰사가 위에 알리어 파직했으나 공은 아무렇지도 않고 있었다.
2년이 지난 후에 승지로 배하였다. 그 때 청국에서 조사하는 사신이 오니 조정의 신하들이 화라도 일어날까 무서워 떨고 있었다. 그때 임금께서 사신을 공이 옆에서 은밀히 영(令)을 도와서 때에 맞도록 움직여서 그 폭사가 없도록 무마시켰더니 무사하게 되었다.
좌우에서 이 일을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상께서도 또한 신임하는 정도가 높아져서 호서관찰사로 배하셨는데 사양하고 도임하지 않았다.
정미년에 승지로서 왕세자책례 때에 예방이었던 수고로 가선의 계급으로 오르고 광주부윤으로 배했으며 얼마 있다가 이를 그만두었다. 이후로 연달아 우윤과 총관과 공조참판에 배하였고 경술년에 정도위 재윤이 상사가 되어 청국으로 갈 때 정상국 태화가 조당에서 전부에게 말하기를 '나의 아들이 나이가 아직 젊어서 일을 잘 모르는데 부사가 훌륭한 사람이 따라가지 않으면 국가의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한다.' 하였다. 전부에서 그런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워 하니 상국이 말하기를 '이모가 아니면 이 일을 담당할 사람이 없다.' 하여 공이 부사가 되어 모든 일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
별시 전시 고관으로 차출되었을 때에 공의 아들 부학공이 제생으로서 시정에 나가 시험 볼 때 공은 입을 다물고 고교하는데 참여를 하지 아니 하였는데 대신으로서 시험을 주장하는 사람이 물으면 겨우 대답해 줄 뿐이었다. 이름을 듣고 보니 부학공이 제2명에 뽑혔었다. 공께서는 자신이 빈한한 선비로 있을 때 영남사림의 신망이 두터웠다.
그 때 유직이란 사람이 상소를 하여 이신의 종향을 배척한 일이 있는데 공께서 사실상 참여하였는데 시의가 투질하는 무리들이 많았으나 공이 임금에게 신망이 두터움으로 잠잠하더니 이때 모든 대간들이 일어나 과거를 삭제하기를 청하여 공에게까지 미치게 되니 명관과 모든 고관들이 상소해서 그 사실을 밝히고 거짓됨을 밝히니 상께서 엄중히 대관을 물리치고 이르시되 '압론하는 것이 근거가 없다.' 하였는데, 그로 인해 대관이 반년 동안이나 잠잠하였다.
공께서 양주목사를 제수받았고 계축년에 우윤으로 불려들었다가 얼마 안 있어 특별히 도승지로 제수하니 대관이 경력이 얕다하여 바꿀것을 청하니 상이 노하여 가로되 '방금 당론이 위선이 되고 공도가 다음이 되니 만약에 당론을 취한다면 원정은 거의 안 맞음이 오래고, 만약에 공도로 말한다면 이런 말은 심히 부정한 말이다.' 하였다.
공께서 두 번이나 상소를 올려 사임하고 이로부터 여러 번 형조참판과 도승지와 예조참판으로 벼슬을 받으셨다.
현종께서 돌아가시니 산릉도감 제조로 차출되셨다. 그 전에 왕대비의 병환이 있을때에 약에 대한 수고한 공로로 가의의 계급을 더하셨다.
을묘년에 대부인의 상을 당해서 관을 모시고 영남으로 돌아갈 때 상께서 삼도에 명령하시어 호송케 하시니 특별한 은총이었다. 상을 마치니 형조참판으로 배하였다가 다시 대사간으로 옮겨 조정으로 돌아오게 했다.
공이 고향집에 있을 때 조정에서 만과(萬科)를 설치하여 그 실시함이 사람 뜻에 맞지 않음이 많다는 말을 듣고 범문 정의 고사로서 재상에게 편지하여 가로되, "지금까지 저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부하는 무리로서 빠른 시일에 좋은 자리에 뽑혀서 조정의 이름 있는 벼슬자리를 자기의 사적인 것 같이 보고 온 것만으로도 저 사람들의 죄라고 하겠은즉 지금 와서 마땅히 한번 바로 잡아지지 않고 도리어 본보기가 되니 이렇게 되면 옛사람이 어찌하여 '자기에게 허물이 없고서야 남의 허물을 말 할 수 있다'고 하였겠는가? 만약 각자가 친한 사람을 유주 앞에 천거하게 되면 전관에게 청탁하게 되는 것과 같이하니 더욱 한심한 일이다. 만과를 설치하는 것은 광해때의 말정인데 혼조의 말정으로 성세의 초정을 삼으니 이것은 무슨 일이냐" 하였는데 그때 상신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이때 와서 상께 뜻하신 바에 대해 여러 천 마디의 말씀을 올렸는데 머리말에 '의리를 밝히고 공사를 분별하고 현신을 친히 하고 편벽된 사람을 멀리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고 서로 날뛰며 경쟁하는 것을 억제하고 매사에 머뭇거리고 용단성이 없을것을 경계하고 요행을 바라는 것을 막고 벼슬을 소중히 여겨 조정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며, 국민들이 도탄에 빠져 원성이 날로 더하니 구원하고 진기시켜 나라의 근사를 굳게 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하는 일에서 당연히 없애야 할 것이 다섯가지인데 체부청을 없애는것이 그 중 하나요, 당연히 세워야 할 일이 다섯가지인데 영남에 대동법을 세우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라고 상소를 했더니 상께서 퍽 좋게 생각하시고 아름답게 칭찬하셨다.
그 때에 숙종께서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아 방례를 고치고 종통을 바로 잡기로 하니 미수 허선생이 앞장서서 건의하여 위로 태조에 고하기를 청하니 태학과 사방의 선비들이 다 계속하여 건의하였다.
공이 변론하는 상소를 하니 대략 가로되 종통을 바로 잡게 되었으니 불가불 고해야 할 것이며 인심의 미혹함은 불가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은 갑의 논하는 바이며, 논리가 비록 바르다 해도 형격되는 것을 가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고, 절목이 비록 갖추어졌다 해도 어긋날 일을 가히 근심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을의 논하는 바이다.
이 둘은 다 주장하는 바가 있으나 생각건데 이 이론이 때가 지나서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 좋으려니와 이미 일어난 후에는 꺽거나 거절하기를 마치 함부로 일어나는 무리를 막는 것 같이하면 이것을 이론에 맞추어 보면 실로 부당한 일이 된다.
천지의 떳떳한 법이 멸망하여 남음이 없음에 온 나라의 모든 사람이 없음에 온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비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어늘 누구인가 혹 그것이 잘못될 것이라 하였다가는 금고와 찬축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을 당하게 되어 사람의 입을 막고 오히려 부족하여 다시 예금을 베풀어 널리 팔방에 고하고 도거(刀鋸)를 설치하여 말하는 자가 있나하고 기다리니 이런 일을 선왕께서도 항상 속임을 당한것에 통분하게 여기 신 바 있고, 전하께서 절치부심하신 가르치심입니다.
그런데 우러러 호생의 덕을 본받고 불살의 인심을 갖추어 다만 정통에 대한 것을 태묘가 가함이 없어야 한다는 청을 한즉 이것이 실로 그 논쟁을 미리 정지 시킨 좋은 일 입니다.' 하였다.
공은 관후하고 마음이 크시어 비록 국내에 말이 많고 붕당이 일어난 때를 당해서도 입론하는 것이 굳세고도 은혜로우며 엄하고도 관대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만과를 시행하고 체부를 설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색을 하며 다른 주장을 세움이 조금이라도 거짓됨이 없었다.
병조참판 주사유사(籌司有司)를 배하고 또 진청당상을 겸하고 대사간을 배하니 원료가 헌부와 같이 고묘하는 일을 계하고자하거늘 공이 말하기를 "일이란 소상하게 하는 것이 귀한 것이니 좀 더 기다리라" 하였더니. 혹자는 더디다하며 공을 의심하므로 공은 인피할까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발계하게 되었다.
윤헌경이란 사람이 있어서 공을 꼬집어서 괴롭히니 공은 상소하여 변론하되 "교묘하기를 '의논한 사람들의 말에 때를 놓친 혐의는 적고 마땅히 고해야 할 의는 크니 작은 혐의를 가지고 대의를 폐할 수는 없다.' 하니 신은 여기서 의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이미 일어난 이상 또한 막기 어려운 일이라 오례한 자들에게 죄를 가하지 않을 때까지 이르게 된 것은 실로 의논이 다같이 함십해서 하고자 한데서 나왔는데 헌경은 의심이 가득차고 깊었으며, 헛된 환상을 그리고 있으니 이것은 원망이 쌓이고 노여움이 깊어서 이러한 일을 한것이라고 볼 것이다. 저 사람들이 손으로 왕작을 잡고 입으로 천헌을 막으며 지나온 지 오십 여년인데 신은 꾸부리고 우러러 보거나 굽실거리는데 능하지 못하고 취하고 패하는데 평범하여 관심이 없는데 만약 머리를 숙이고 기를 죽이고 아첨하고 순종하는 것은 마침내 나의 광연한 성품으로 갑자기 할 수 없는 일이라." 하였다.
대사성을 겸하니 정경으로 국자를 겸한 것을 성조에서는 드문 일이다.
무오년에 청나라 사신을 의주에서 맞아들이고 또 보낼 때도 같이 하였다. 돌아와 복명하매 판윤을 배하고 처음으로 영남대동법을 행하였다. 그 전에 대동법이 양호에서만 행했고 오직 영남에서는 전과같이 임토작공(任土作貢)하니 백성들이 상사들의 강제로 물건을 요구하는데 견디지 못하였으므로 공이 일찍이 임금님의 생각하시는 바에 맞추어 상소하여 이 일을 힘써 말하였더니 이때에 와서 조정에서 비로소 공에게 그 일을 맡아 보도록하니 공은 여기서 백성이 가진 토지를 감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곡식의 소출을 참작해서 상공할 것을 계산하고 관용할 것을 헤아린 다음에 그 원근을 가리고 그 노력을 참작하여 꼭 나라에서 필요하고 백성에게 이롭게 되는 일만하여 결정이 된 뒤에 널리 펴서 행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고 비석에 새겨 송덕을 하였다.
때마침 진향사가 달려와 아뢰되 중국이 크게 우란하다하니 조정에서 의논하여 금군을 더하기를 의논함에 척신 김석주가 실로 공이 주장하되 공이 불가하다할까 염려해서 마침 반궁에서 공을 만나서 변방의 일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서쪽 오랑캐를 경계할 바가 많으니 체부를 반드시 다시 설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체부를 설치키로 하면 금려를 마땅히 더하여야 될것이니 이것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될 일이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무익한 것으로서 한갓 인심과 나라만 동요 시킬 뿐이며, 금려를 더하는 것도 이것과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병권을 주장하는 자가 직책상 마땅히 근심될 것이나 자기의 견해가 있으면 자기 스스로 곧 말씀드리는 것이 어찌 잘못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 뒤에 등대할 적에 공도 또한 의중에 방비가 소홀하거나 또는 병신(柄臣)이 그 일을 맡아서 하니 반드시 나의 의견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제신과 따라서 대답을 하였더니 얼마 안 있다 체부를 다시 설치하라는 명이 있었다.
대사헌으로서 호조판서로 옮겨 배하였다. 그 때에 청나라 사신이 왔는데, 상께서 병환중이라 교외까지 영접할 수가 없어서 중신을 보내 이 연유를 말을 전하니 사신이 고지하고 허락하지 않는지라 공이 명을 받고 길을 막아서서 여러 번 반복하여 깨닫도록 말하니 사리가 명확한지 사신이 경복하여 오직 공의 말이라면 들어주었다.
우참찬으로 옮기어 지의금부사를 겸하니 그 때에 강도에서 역서하여 변을 알리니 흉역(凶逆) 유정(有湞)을 잡아 국문하매 조의가 도형으로 다스려 구형을 하기로 하니 공이 말하기를 옥에서 국문하는 법이 정하는데 형벌이 있는데 한상당 명회가 처음으로 낙형을 시작하여 그 유독이 지금까지 내려왔는지라 옛법이 아닌 것을 창제한다는 것은 옳다고 생각할 수 없다하니 모두 다 옳다 하였다. 이에 원악은 벌을 받고 나머지는 많이 평범하게 용서되어 나가는 자도 있었다.
대사성으로 옮기었다가 이조판서로 홍문관제학을 겸하니 사양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더욱 공도를 가지고 편벽을 없애고 비록 자기와 다른 편 사람이라도 의연히 참용해서 쓰게 하니 이 때문에 대각이 있어도 임금께서 공이 다른 뜻이 없는 것을 알고 더욱 공을 믿었다.
숭정계에 뽑혀 판의금부사를 겸하니 비국과 경연과 제학과 성균관 춘추관 내국 괴원 종부 역원 찬화사 진청 선공등은 전형을 맡았을 때에 겸해서 관장하였으며, 그 때 공은 가장 걱정하고 두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이 때에 있어서 김석주가 담담히 일변인을 노려봐서 궁중을 통해서 허튼 말을 꾸며내서 임금을 공동시키는데 갖은 수단을 다하니 상께서 자리가 바뀔까 두려워서 공을 삭출하였다. 조금 후 원로(元老), 만철(萬鐵)등이 급변을 고해 올리니 그것은 수상 허적의 서자 견이 요악부도하여 가까이 종친정과 염으로 더불어 모반할 일을 꾀했다하여 석주가 이것을 핑계 삼아 일망타진 할 것을 꾀하여 옥사를 크게 일으키니 이것이 곧 경신옥사이다.
고한 자가 말하기를 "견이 이태서로 하여금 재상들을 격동하여 체부청을 회복하게 함에 공도 연루되었다." 하여 허위 날조하여 마침내 관서리주로 귀양보냈다가 별안간에 납치를 명하여 공을 옥사로 다스림에 공이 역력히 지난날 김석주와 반궁에서 수작한 말을 들어서 그 거짓으로 밝히니 국청에서 서면으로 석주에세 물으니 그 회답이 공의 말과 같고, 또 국청에서 이 말을 알리겠다 하였다. 승지 윤개가 그 원통한데 상심하여 임금님께 말씀드릴 기회를 청했더니 임금께서 형을 멈추고 귀양을 보내라 명했다.
추옥이 다시 일어나 사수의 허튼 소리로 또 피체되어 결국 아무 실상도 없음에 옥사를 다루는 사람들이 앙심을 다시 품고 다시 체부에 대한 말을 끄집어내어 고문이 심하였다.
공께서 심기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정상 지화를 쳐다보고 말하기를 "공은 문익공의 손자가 아니냐" 하였더니 좌중에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는 자가 있어 별안간 말하기를 "감히 오늘 일을 기묘사화에 비하느냐"하니 죄우가 다시는 말을 못하였다.
마침내 청실에서 돌아가시니 실로 윤 8월 21일이라. 이날 흙비가 내리어서 햇빛이 음참하고 빛이 없으니 서울의 사서인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고 눈물을 떨어뜨리기에 이르니, 아! 슬프다. 간사한 무리들이 착한 사람을 죽이고 해치는 것을 옛날부터 얼마나 막았건만 오히려 그럴듯한 방법을 써서 위로는 군상의 총명을 가리고 아래로는 초야의 입을 막았는데 공과 같은 분은 체부 피하기를 힘써 주장하던 처지인데 도리어 체부 때문에 죽음의 길을 면치 못하였으니, 저 당인들이여 그 누구를 속일 것이냐!
하늘을 속일 것인가? 기사년에 상이 후회하시고 제일 먼저 공의 공직을 회복시키고 예부랑을 영외로 보내어 특별히 제사를 내리시고 김상 덕원의 진백으로 인하여 영의정 벼슬을 증직하시고 또 관원을 보내 제사지내다. 부학공이 경연에 오르니 상이 말씀하시기를 "너의 부친이 원통하게 죽었으니 나는 언제나 슬퍼한다." 하며 임금님의 목소리가 목메어 두번 세번 울먹이셨다.
그 산소를 다시 옮길 때 상께서 방백에게 명령을 내리시어 장례를 같이 돌보도록 하시니 그 슬픔과 영광이 이같이 갖추어졌다.
그 후 6년만에 당인이 기회를 타서 다시 탈직을 하였다가 또 19년이 지나서 공의 손자 세원이 북을 올려 그 원통함을 아뢰었더니 상께서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셨다. 윤영 부사 지완이 의논하기를 "김석주가 일찍이 그 원통함을 말하고 그 귀양갈때 선물을 주고 옥형이 있을때는 사실을 밝혀 살고자 하였으나 미처 못 하였다 하니 그 말을 가히 믿을만 합니다." 하니 상의 말씀이 영부의 의논이 옳다 하고 공의 벼슬을 회복하고 품질을 또한 여전하게 하였다. 불순분자가 방해함에 상께서 말씀하기를 "당초의 처분은 나의 과실인데 과실을 또 저지름은 나는 하지 않는다.' 하시니 말한 자가 또한 저지 되었다.
공이 집에 계실 때 내행이 독실하고 대부인을 섬기는데 엄부같이 하고 이를 미루어 여러 아우들을 무애하며 집안 일가들과 화목하게 지내니 이것으로 가히 그 어지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임금을 섬길 때면 띠를 늘이고 홀을 바로잡고 거짓이 없고 남을 따르지도 않고 그 풍절과 재질이 뚜렷한 일대의 명신이 되니 실로 가정에 근본을 두고 나라에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끝내 당화가 몸에 미쳤으나 하늘의 명을 순순히 받았을 따름이니 그 시운에 어찌하리오. 다행히 숙종임금의 성명하심을 힘입어서 비록 조정의 형세가 어지러운 때였으나 공의 충성을 살피시고 공의 원통함을 민망히 여겨 거짓말을 깨끗히 씻었으며 은혜로운 말씀이 밝게 세상에 알려져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간사한 무리들이 일시에 나라의 화를 끼치는 것을 백년이 못되어서 공론으로 옳고 그른것이 정해지니 비록 흉한 불꽃은 사람을 망칠 수 있는 것이나 복인에게는 끝내 능히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당일의 군신관계에서 볼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공의 문장은 말이 순하고 이치는 통달하여 넓고 시원스러워서 일찍이 빈사로서 의주를 왕래할 때 사신이 공의 시문을 애중히 여겨 《조선채풍록》에 실렸고, 《화인문초》에도 뽑혔다. 저서로는 【성산지】· 【중수향약】· 【귀암만록】이 있어 집에 장서로 되어 있다.
공의 춘수는 59인데 장사를 세번이나 옮겨서 기축년에 더불어 영천 개쌍동 감향자리에 합폄하니 정경부인 이씨는 적은 벽진인데 승지 완정공 언영의 따님으로서 남편을 섬기는데 화순하고 예가 있으며, 비록 귀히 되어 명부가 되었으나 검소함을 고치지 않았다.
두 아들이 다 영현했으나 언제나 억제하고 겸손함에 힘쓰지 않을 때가 없었다. 공이 돌아 가신 후 22년 신사에 세상을 뜨시니 향년이 79세라 4남 4녀를 두니 장(長)에 부제학 담명이니 벼슬은 이조참판까지 하셨고, 다음은 한명인데 홍문관 교리이며 다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다음에 준명은 조천했고, 다음에 귀명은 찰방이다. 여(女)에 장은 유명하를 맞았고, 다음은 보덕 최항제를 다음은 좌랑 강상주를 다음은 김승국을 각각 맞았다.
참판은 2남 2녀를 두니 장에 생원 세침이오, 차에 세경을 조천했고 두 사위는 참봉 강개와 목성겸이다.
교리는 3남 1녀를 두니 장에 생원 세완은 곧 북을 울려 공의 원통함을 아뢴 사람이요, 다음은 세보와 세황이다. 사위는 심수간이다.
찰방은 아들이 없어 세보로 입후했다. 유명하의 아들 후겸이오, 세 사위는 참봉 이필과 김석범과 정중백이다. 최항제는 3남이니 좌랑 수경과 수온과 수인이오, 사위는 권세현이다. 강상주의 아들은 유요, 김승국의 2남은 좌랑 동준, 동걸이오, 이서에는 김중례와 이인겸이다. 증현 이하는 많아서 다 올리지 못한다.
5대손 만운이 문과에 급제하여 문행으로 이름나니 금상 20년에 교지가 내려 불러올려 특별히 혜택을 보여주신 것이다. 천리 길 멀리와서 해가 바뀌도록 가지 않으며 명을 청하는자는 6대손 이풍이니 그 정성 또한 족히 사람을 감동 시키었다.
명(銘)하니 왈....
대령이 우람할 손 원신께서 나셨으니
어려서 배우고 커서 행하니 좋은 가문 연원 있네.
임금께서 좋다시며 내게 있는 어진 신하
한림원은 깊고 깊어 3세동안 날개쳤네.
동죽과 은대에서 좋은 명성 날렸건만
저 당파 사람들은 눈흘기며 곁에 있네.
숙종 임금 잘 이어서 사당에 고하는 예(禮)
일월같은 종통을 누가 감히 더럽힐소냐.
어찌 그리 준엄한고 그 포부는 은혜뿐을
성균관에 장이 되고 모든 관청 다 돌았네.
천관이여 총재로서 청탁이란 받지 않아
누가했나 척분끼고 피이빨로 물것 같아
얼킨 그물 하늘 가득 공이신들 면할손가
귀양갔다 다시 잡혀 귀신조차 슬퍼하네.
틀림없는 저 상봉을 지와 악이 쪼았도다.
흙이 날려 비가되니 이 세상이 캄캄해져
10년 세월 흘러가니 왕의 마음 슬퍼져서
네가왔나 공의 아들 가까이한 앞자리에
너의 아비 원통함을 내가 실로 후회한다.
왕의 명령 왕신에게 천리길에 제주드려
시운에는 평파있고 아츰한말 다시이네
왕이 어찌 따를손가 따라서도 잠깐일세.
손자께서 북을 울려 조정의논 널리 받아
나라안의 대신들이 의논하기 밝았으니
왕의 말씀 이쯤되니 나도 이제 깨달았다.
빛나도다 은혜로운 말 하늘같이 내리셨네.
깊고 깊은 저 땅속에 태양빛이 비추이고
원수된 자 기가 죽고 모든 입이 막혀졌네.
어느 임금 신하 없고 오느 신하 임금 없나
이같이 슬픈 영광 볼만할 손 군신이여.
개쌍이란 마을안에 천기조차 명랑하니
검은 머리 변치않고 이 세상과 같이하리
이 삼엄하여 너의 편당 벨 것이다.
7대손 조수(肇秀) 삼가 쓰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검교 규장각 제학 평강 채제공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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