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사 이공(李公) 영세불망비와 그 비문해석 > 석전종중 - 유물/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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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종중 - 유물/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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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관찰사 이공(李公) 영세불망비와 그 비문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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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8-05-20 06:52 조회 5,27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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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담명이 1690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룩한 치적에 대하여 백성들은 그 은총을 영세토록 잊지 않는다는 의미로 세운 비석이다. 비석이 세워진 시기는 무자(戊子) 10월이라고 되어 있는데, 비문을 쓴 배익휘(裵益徽, 1658년생)의 생년을 감안해 볼 때 1708년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담명은 1690년 8월 한재에 고통을 받는 경상도의 관찰사로 부임하여 조정의 명보다는 백성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는 중앙으로 올라가야할 곡식을 경상도민을 구휼하는데 우선적으로 분배함으로써 백성을 굶주림에서 구했다고 한다.

그 해 겨울에는 이 일로 인하여 중앙의 반대세력으로 부터 정치적인 공세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본래 이 비석은 칠곡면 구암동 도로변(현 대구시 북구 구암동)에 있었는데 1973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현재 왜관읍 석전리 애국동산에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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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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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 이공 영세불망비명 병서

통정대부 전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배정희 찬
생원 배익휘 서 병전






이 사람이 어렸을 때 고(故) 참판(參判) 이공(李公)을 따라서 같이 놀던 일이 있어서 그의 가지고 있는 행동을 엿보았더니 모습이 온화하고 지식이 밝으며 몸가짐은 검소하고 절약하며 절대로 화려하거나 들뜬 일을 하지 않고 화이하면서 지킴이 있고 담박하면서 더럽힘이 없으며 효성스럽고 우애함이 본시 타고난 천품이며 화목함에 있어 거짓이 없이 집안일이 잘 행해지고 친척들이 다 즐거워 하였다.

조정에 서게 되어서는 공사(公事)를 먼저하고 사사(私事)를 뒤에 하며 충성을 다하는데 힘을 쓰고 또한 선비의 도를 심고 유교의 학문을 바로 잡고 뚜렷하게 후진들의 종주가 되었더라. 나가서 영남을 다스릴 때 너그럽게 은혜를 베풀고 잘 교화를 시키고 백성에 이롭게 할 수 있는 일을 굳세고 용감하게 행하였다.

이때가 바로 경오년 큰 흉년이 닥쳐서 백성들이 굶주려서 혼미하게 되어 죽어가고 이사하는 사람들이 길에 가득 차니, 공의 자상한 마음과 어진 덕으로 백성을 잘 구제하는 방법이 있어 무릇 잔휼하는 정책에 각별한 계획을 세우고 마른 데를 때를 따라 적시어 주기를 어린 아이에게 젖 먹이듯이 하여, 모든 민생을 널리 건지는데 고루 흡족하니 한 도의 전체 백성들이 거의 다 죽음에서 일어나 우러러 보기를 사랑하는 어머니나 산부처 같이 하니 그 덕이 전도민에게 베풀어짐이 이같이 성하기도 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후 몇 해까지 칠곡 사람들이 공의 덕을 사모하고 더욱 오래되도록 잊지 못하여서 큰 덕을 형용키 위하여 풍성한 비석을 길가에 세우기로 하고 마침내 서로 와서 말하기를, 공의 혜택이 도민에게 흡족히 베풀어진 것은 참으로 한 두가지가 아닌데 또 돌아 보건데 칠곡 일읍이 더욱 혜택을 힘입었으니, 칠곡땅이 궁협한 사이에 끼어 있어서 성으로서 읍이 되었는데 산언덕과 골짜기가 높고도 좁으며 그 거리가 수리에 걸쳐서 꼬불꼬불하여 이곳을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가면 마치 칼날을 딛는 것처럼 위험한데, 군량으로 바치는 곡식 십분의 일을 평지의 모든 고을들과 똑같이 운반해서 바칠 때에 그 백성들의 울부짓는 소리가 가엽게 들려서 공이 혜택을 베풀고자 걱정한 나머지 이것을 폐해야겠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 사실을 상께서 들으시고 이 일을 면하여 감해주시니 백성들이 좋아하며 신음 소리가 변해서 노랫소리가 되고 근심 걱정이 고쳐져서 낙이 되어 편안히 살 수가 있게 되었다. 아직 기술함이 없어 몰세한 뒤의 사모의 정성을 부치지 못하거늘 내 또한 말하거늘 '그 당시의 사람을 손꼽으라면 공이 당연히 첫째가 될 것이며 나가서 그가 할 일을 다 해보도록 하였다면 임금을 도와서 좋은 정치와 교화가 반드시 크게 볼 만한 것이 있었을 터인데, 일찍이 순조롭게 못하였고 중세에 와서 일을 한 것이 큭히 그 한가지며 만년에 더욱 모든 일이 잘 되지 않았고 결국 오래 살지도 못했으니 아깝도다! 그 덕화하는 사업을 밖에서 베풀어서 모든 백성들을 잘 살도록 한 것이 그 전체의 일단인 것이다. 여기서 소모되는 것을 감해서 읍민들을 소생시키는 것을 또한 다른 정치에 비하면 적은 일이다.

그러나 공은 정사를 함에 있어 적은 일이라 해서 소홀함이 없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인인(仁人)의 정치란 그 이로움이 넓기도 하도다. 드디어 사양치 않고 명(銘)을 하게 되었으니 이공의 휘는 담명(聃命)이오, 자는 이로(耳老)니 광릉인(廣陵人)이라 여러 대를 벼슬이 높고 덕이 후하여 세상 사람들의 칭송함이 되었다.




명(銘)에 왈(曰),,,,,

근본 갖춰 좋게 쓰고 덕을 쌓아 후히 쓰네.

생각건데 이공께서 학문 높고 절개지켜
조정에서 벼슬하니 구포(九苞)에 봉(鳳)이로다.

밖에 나가 정치펴니 부모같이 은육했고,
악세(惡世)당해 어진 정치 고목나무 비 내렸네.

내 늙으니 봉양하고 내 어린이 길러내며
소모된 것 감해주고 폐단들은 혁신했네.

덕 펴기를 두루함에 한가지로 백을 증명
우뚝하게 이 돌 세워 백성들의 마음 부쳐
돌은 혹시 깎일 망정 생각이 끝일소냐.


감역출신 이여주가 무자 10월 일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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